올림픽이 추방한 "야만 음식" 보신탕



#스위스인 부부에게 그건 정말 악몽이었다. 홍콩에서의 일이다. 넓고 우아하고 맛깔스러운 레스토랑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그들은 행복했다. 친절한 웨이터에게 그들의 푸들 애완견 '로자'를 맡길 때 약간의 소통장애가 있었지만 그건 별 문제도 아니었다. 식사는 훌륭했다. 코스 요리가 입에 딱 맞았다. 계산을 할 때까지도 좋았다. 그런데 '로자'를 돌려달라고 하자 웨이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지 않는가? 마치 맛있게 잘 먹고 무슨 얘기냐는 듯…

#일제강점기 조선풍요(風謠)에 '개먹고 콩 먹고'란 노래가 있다. "어제는 개 한 마리 잘 먹더니 오늘은 감방에서 콩밥을 먹네(昨日食犬 今食太). 점 하나 위아래 옮겼을 뿐인데 아, 이 내 몸 왜 이리 고달픈가(上下一點 苦吾身)." -큰 대(大)자 위에 점이 붙으면 개 견(犬), 아래 붙으면 콩 태(太)자가 되는 걸 절묘하게 신세타령으로 만들었다. 개고기를 먹다 일경에게 치안죄로 잡혀 콩밥을 먹는, "내나라 음식조차 제대로 못 먹는 설움"을 노래한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경찰은 기르던 개를 잡아먹은 동남아지역 난민들 처리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몇 명이 외딴 곳으로 캠핑을 가며 기르던 개를 데리고 갔다가, 올 때는 사람만 돌아와 뒤를 쫓아보니 개를 잡아먹고 오는 것이었다. 주법은 "애완동물을 학대하거나 고문하고 죽이는 행위는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주인이 기르던 동물을 먹는 걸" 금하는 조항은 없었다. 결국 의회는 "식사용으로 개 고양이를 죽이면 처벌하는 법"도 만들기로 했다.

동서양 막론 치열한 '보신탕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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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본 동양의 아침 – 동서양 개 논쟁
1974. 1. 22 [경향신문] 5면

어떤가. 잘 꾸며낸 '소설' 같이 들리는가. 아니다. 모두 1970~80년대 신문에 실린 기사다. 송고자의 크레디트도 달린 믿을만한 뉴스라는 얘기다. 홍콩의 '로자' 이야기는 71년 8월 20일 스위스 취리히 발 로이터통신 기사로 평론가 이어령 씨가 인용했다. 캘리포니아의 경우는 80년 12월 UPI가 타전해 해외토픽에 실렸다. 개먹은 죄로 콩밥 먹은 설움은 신문사 논설위원이 소개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개식용이 그만큼 말이 많다는 증좌다.

일찍이 "개먹는 게 왜 잘못이며 그게 무슨 문명의 척도냐?"며 개 논쟁에 불을 지핀 건 이어령 씨다. 74년 '동서양 개 논쟁' 칼럼을 통해서다. 훗날 유명해진 명제, "개는 개답게 살다 개답게 죽기를 바랄 것"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그는 우선 ‘로자’의 사례를 분석했다. 스위스인 부부가 '로자'를 가리키며 "밥을 주라"고 나이프와 포크로 뭔가 써는 시늉을 했을 테니 웨이터는 "'로자'를 스테이크로 만들어오라"고 착각했을 법하다고 지적했다.

이 씨는 더 나아가 "동양에서 동물을 식당 주방에 데려오는 경우는 '먹기 위해서'일 때 외에는 없다"는 걸 들었다. "동양에서 가축이 식당 근처에 오는 경우란 요리의 재료가 되기 위해서다. 적어도 동양인은 개와 한자리에서 식사하는 법은 없다. 그들 눈으로 보면 개고기를 먹는 동양인이 야만인처럼 보일지 모르나 이쪽에서는 개와 식사를 같이 하는 그들이 도리어 우습게 보인다." 그러면서 그는 정말로 하고 싶은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서양 친구들, 그들은 정말 개를 사랑하는가? 진정 동물애호자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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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는 아니라고 말한다. 애호자는커녕 개를 학대한다고 주장한다. 개를 "방안에서 기르는 것부터 개의 본성을 무시한 잔학행위"며 "침대에 재우고 목욕을 시켜 개를 개로 키우는 게 아니라 인간과 똑같은 생활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털을 깎은 뒤 춥다며 사람처럼 옷 입혀 미장원 출입을 시킨다, 향수를 뿌리고 발톱 매니큐어를 칠해 준다, 네발로 다니는 개를 두발로 걷는 인간처럼 대하며 그걸 애호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개는 어디까지나 개로서 살아갈 때 자유와 행복이 있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정부, 1975년 '보신탕집 양성화' 추진

사실 '개를 개로서 키우는 것’과 '개를 먹는 것’은 다른 사안이다. 하지만 칼럼이 나가자 '왕왕 족'들은 열광했다. 그러잖아도 74년은 쇠고기 품귀파동이 일어난 해. 복날이 되자 보신탕집엔 사람들이 미어 넘쳤다. 아마 이런 세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보사부 등 관계당국에서는 쇠고기파동은 물론 개 사육에 들어가는 식량을 줄여 양곡도 절약할 수 있다는 생각 아래 개고기를 식용으로 인가하는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성단체 등의 반발이 거세 쉽게 안을 내지 못했다. 그러다 한해를 넘긴 75년 3월.

서울시는 보신탕집을 무허가 식품업소 양성화 대상에 포함시키고 1000여 보신탕집에 등록증을 발부키로 했다. 축산물가공처리법, 식품위생법 등 관련법에 개는 식용 수축(獸畜․소 말 양 돼지 닭 오리)에 포함되지 않아 개를 잡아 식용으로 파는 건 무허가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양성화한다는 것.


개고기도 식품으로 인정
1975. 3. 19 [경향신문] 7면

보사부가 개고기를 아예 식용으로 인정해 도축 유통과정에서의 위생처리를 꾀하다 실패한 전철을 답습하지 않으려는 듯 무허가 업소만 양성화시켜 허가를 내주는 교묘한 개의 식품인정 책을 내놓은 것이다.



군용견협회 등 크게 반발했지만..

그러자 이번엔 군용견협회에서 “개의 권익을 보장해 달라”며 항의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잘 훈련된 개는 유사시 훌륭한 병력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식량을 줄인다고 개 사육을 억제한다는 둥, 개를 식품으로 인정한다는 둥 뭘 모르는 정책을 세우고 있으니 안타깝다"며 "적어도 군용견 예비역이 보신탕집에 고기 값으로 팔려나가는 경우는 없어야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는 물론 정부에도 영향력을 행사할만한 힘이 없는 군용견협회 주장이 이미 틀어진 물꼬를 돌릴 수는 없었다.

이후 70년대 말까지 개고기를 두고 좋네, 나쁘네, 그야말로 백가쟁명 식 말이 무성했다. 외신도 한몫 해 "타이완에서는 개고기를 '향기 나는 고기'라며 판매해 손님이 미어진다."는 기사가 실리는가 하면 바로 "타이완당국이 애완견 멸종을 막으려고 개의 식용을 금지시켰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또 78년엔 프랑스 렉스프레스지 요리평론가 등 일급요리사 4명이 중국을 방문해 각종 음식을 맛보았는데 그중 경이적인 맛으로 찬사를 받은 게 개고기며 "너도나도 한 그릇씩 더 주문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는 얘기도 소개됐다. 내용이야 어쨌든 "복날 개장국은 괜찮다"는 기저가 기사에 깔려있었다.



영국·필리핀, '개 식용' 두고 외교전 벌여


'보신탕 규제' 1년 간판 바꿔달고 성업
1985. 9. 6 [경향신문] 9면

그러나 이런 분위기가 오래 가진 않았다. 내놓고 개고기를 즐기던 한국의 '왕왕 족'이 슬슬 위기감을 느끼게 된 건 81년부터다. 영국과 필리핀이 개의 식용을 놓고 정부 국회 차원의 공방을 벌이는 등 '개판 외교' 불똥이 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해 11월 영국의 '데일리 미러'지가 필리핀에서 보신탕용 개들이 쇠줄에 묶여 '개죽음'을 기다리는 사진을 1면에 실은 데서 비롯됐다. 영국인들이 끔찍한 사진에 넌더리를 치며 필리핀과의 교역중지, 외교적 압박 등을 요구했고 대처 수상도 '경악, 혐오감'을 표시했다.

그러자 이번엔 필리핀이 발끈했다. 한 의원은 국회에서 "우리가 개고기를 먹건 말건 그건 우리 문화고 국내문제다. 영국이 우리더러 잔인하다고 하는데 과거 식민지에서 인간에게 더욱 잔인하고 못된 짓을 한 영국이 어디다 대고 그딴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이냐?"며 흥분했다. 깜짝 놀란 영국이 "필리핀 국내문제가 공연히 확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성명을 내 사태는 수습국면에 들어갔지만 ‘개를 먹는 문제’에 대한 동서양의 인식이 완전 평행선을 긋는다는 걸 확인시킨 계기가 됐다.



88년 올림픽 앞둔 정부, 보신탕집 정비지침 발표

1980년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의 신군부는 외국의 한국 군부정권 인정이 절실했다. 그래 국제회의를 서울로 유치하고 외빈들도 대거 초청하는 등 선심공세를 외교의 주요 전략목표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또 보신탕 논쟁이 시작됐다. 서울거리에서 쉽게 개고기를 접하고 '야만스런 식성'이라고 비웃을 게 두렵다는 의견이 나왔다. 게다가 86 아시안 게임, 88 서울올림픽을 치러야 하는데 '개고기를 즐기는 한국인 이미지'로는 손님 유치(대회 참가)에 문제가 있을 것도 분명했다. 영국과 필리핀 보신탕 논쟁을 통해 서양인의 개고기 혐오는 이미 충분히 보지 않았는가.

82년 3월15일. 서울시는 보신탕집을 뒷골목으로 이전시키거나 차차 폐쇄한다는 정비지침을 발표했다. 75년 3월 무허가업소 양성화 이후 꼭 7년 만에 다시 보신탕 규제가 시작된 것이다. 6월부터는 도로변에서 영업을 못하게 하더니 나중엔 읍 이상 도시에선 개고기를 팔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보신탕•뱀집 정비…뒷골목으로 이전
1982. 3. 15 [동아일보] 11면


새 이름을 찾습니다 – 보신탕 애호가 일동
1988. 6. 3 [한겨레] 5면

이런 가운데 미국 영국 등의 동물보호단체들은 걸핏하면 "한국이 보신탕문화를 없애지 않으면 올림픽 등을 보이콧할 것"이라는 으름장을 놓았다. 브리지트 바르도 같은 프랑스 여배우는 그때부터 종종 한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개의 식용을 금지시키라"고 윽박질렀다. "왜 서양의 눈에 맞춰 우리 식성을 바꿔야하느냐" "어디 건방지게…" 등 의견이 없지는 않았으나 애써 무시됐다.

올림픽기간 동안 개고기를 즐기는 한국인은 숨어서 보신탕을 먹어야 했다. 위험부담이 커진 식당들은 개 값을 올렸지만 그래도 수요가 줄지 않아 중국 등에서 밀수입하기도 하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현상을 반영하듯 88올림픽이 끝나자 바로 보신탕 양성화 여론이 불거졌다. 일부 애호가 기업가는 아예 신문에 자사 광고와 보신탕 찬양광고를 냈고 체인 보신탕집을 열겠다는 사람도 생겼다. 법원에서는 '개고기도 식품'이라거나 '개고기는 혐오식품이 아니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애완견에 대한 인식은 바뀌었으나..

그러나 88올림픽을 지나며 한국인도 이어령 씨가 지적한 애완동물 치장 붐에 빠져 있었다. 식구 수를 얘기할 때 개까지 포함시키는 사람들이 개를 먹는데 동의하는 건 ‘죽어도’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개를 먹는 사람은 "예뻐하는 개와 식용 개는 다르다"고 항변하지만 그렇다고 내놓고 개를 먹고 이를 쑤시는 것도 아니다. 고유의 풍습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개는 숨어서 먹는 세태, 바로 1990년대 이후의 한국이다.

어제(8월7일)로 입추, 말복이 한꺼번에 지나갔다. 요즘 대부분 개들은 주인을 잘 만나 삼복더위를 별 걱정 없이 보내는 것 같다. 그래도 어쨌든 그 위험하단 삼복을 무사히 지냈으니 견공들, 더 큰 행복감과 자유로움을 느낄런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