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역사%%

%%필리핀 역사의 시작을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을 만한 기록은 없다. 특히 스페인을 비롯한 대외세력이 필리핀에 침투하기 이전의 역사는 흔히‘고대문명’으로 통칭되고 있다. 이 시기의 기본적 통치 형태는 ‘바랑가이(barangay)'라는 족장 지배 체제였다. 바랑가이는 대개 30~100가구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마닐라(Manila), 세부(Cebu) 등과 같은 지역에서는 2,000명 이상이 포함된 바랑가이도 존재했다고 한다. 바랑가이에는 독자적 지배자인 다투(datu)가 존재했다. 다투는 최고의 행정권자이자 입법가, 재판관, 군사지배자로서 대부분의 권한을 독식했으나 마을의 중대사를 결정할 일이 발생하면 마을 원로들로부터 조언을 들었다. 

고대시기 필리핀에는 무역을 통해 이슬람이 전파되었고, 참파(Champa)와 교류하였으며 송(宋)과 명(明)의 상인들이 드나들었다. 특히 정화(鄭和)의 원정당시 명나라는 60여 척의 배를 이끌고 3차례에 걸쳐 필리핀을 정벌하기도 했다. 남부 민다나오(Mindanao) 지역은 14세기부터 이슬람 왕국이 성립되어 이 지역의 무역을 통제하였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필리핀은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역사는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은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받아 1521년 필리핀을 발견했다. 마젤란은 세부 지역의 막딴(Mactan) 촌장인 라푸라푸(Lapu-Lapu)와 벌인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마젤란 사후 스페인은 필리핀이 무역 기지로서 최적의 지역으로 인식하고 본격적인 식민화 작업에 착수했다.

19세기에 들어 필리핀의 결집된 민족주의는 외세에 대한 강한 반발을 외부로 표출하였는데 이는 스페인의 대 식민지 정책이 유화적으로 변화한 틈을 탄 것이었다. 호세 리살(Jose P. Rizal)이 대표적 인물로 그는 1892년 필리핀민족동맹(La Liga Filipina)을 결성하여 사회개혁을 시도하였다가 까띠푸난(Katipunan)이 일으킨 폭동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어 1896년 식민당국에 의해 처형당했다.

1898년 필리핀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자 스페인은 필리핀을 미국에게 양도하였다. 새로운 식민지배 하 필리핀의 정치 및 행정체계는 급속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영어를 널리 사용하도록 교육 체계를 개선하고 전국에 영어로 수업하는 학교를 세웠다. 이는 스페인이 종교를 통해 꾀하려했던 민족정신 말살 정책과 유사한 것으로 민족의식을 희석시키기 위해 교육을 장려한 것이었다.

1941년 일본군은 예고 없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고, 몇 시간 후 필리핀 곳곳을 공습하기 시작했다. 결국 1942년 1월 일본군이 마닐라를 완전히 점령하였고 1945년까지 필리핀은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된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내세워 백인의 아시아 지배를 종식해야한다는 명분으로 필리핀 통치를 정당화 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듬해 7월 4일 필리핀은 4세기 간에 걸친 외세의 시달림에서 드디어 해방되었다. 독립 이후에도 미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이 지속된 가운데 막사이사이(Ramon Magsaysy, 재임 1953~1957)는 일본 식민지 시기부터 싹트기 시작한 공산주의 세력을 억제하였는데 특히 후크발랍(Hukbalahap, 抗日人民軍)을 와해시키고 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이 후원하는 필리핀의 민주주의는 마르코스가 등장하면서 폐기된 것처럼 보였다. 1965년 11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민족당 출신의 마르코스 상원 의장은 자유당의 마까파갈(Diosdado Macapagal)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첫 임기(1965~1969) 동안 마르코스는 효율적 세제운영과 대외차관 유치로 국가재정의 안정을 도모하였고,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는 한편 각종 밀수 및 범죄자와 공산세력을 소탕하였다. 1969년부터 세계 경제가 하강 국면으로 치달음에 따라 필리핀의 경제도 위기를 맞았다. 1972년 마르코스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21년간 독재의 길을 걷게 된다.

마르코스의 정적인 베닝요 아키노(Beningo Aquino Jr.)가 1983년 암살당하자 대중들은 마르코스의 하야를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1986년 2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마르코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반정부세력들은 선거관리위원회를 장악한 마르코스 진영이 선거부정을 저질렀다고 폭로했다. 결국 군부마저도 마르코스에게 등을 돌려 군사 시위에 참여했고, 마르코스는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베닝요 아키노의 미망인인 코라손 아키노(Corazon C. Aquino)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그는1987년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 관료제를 마르코스 체제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개혁을 시도하였다. 7명의 후보가 나선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라모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 에스트라다가 1998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에랍’이라고 칭해지는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영화배우 출신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대변인으로 전 대통령들의 과업을 이어 받아 개혁을 이어가겠노라고 약속하였으나 민생을 돌보지 않고 정실주의(cronyism)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민다나오의 모로(Moro) 무슬림을 자극하여 정치적 갈등을 증폭시켰고, 불법 도박을 묵인하기도 했다. 결국 2000년 11월 도박 혐의로 필리핀 역사상 최초로 탄핵을 당한 대통령으로 기록되면서 불명예 퇴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