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 할 줄 알았더니 노인들 똥 기저귀나 빨러 오냐"&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세상을 사는 이는 없다. 대체로 사람들은 '변했다'는 말에 화들짝 어지러운 기색을 하지만 생각해보라,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강산은 십 년이면 변하고, 영원할 것 같던 첫사랑은 이제 남의 사랑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이 산다는 것은 불변의 생각이나 감정 따위를 매순간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무쌍하게 변해온 나를 '설명'하면 될 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입증을 강요하는 것, 그것이 바로 '타자에 대한 폭력'이다.

오늘 이 사람의 사는 이야기를 전하는 까닭은 스스로 변해가는 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말하고 싶어서다. 전남 영광의 농촌공동체인 '여민동락' 대표인 강위원 광주광역시 광산구노인복지관 관장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1997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5기 한총련 의장(5기)을 지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를 '강 의장'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80년대 학생운동은 매매 가능한 자산이라도 있었는데 90년대 중후반 학생운동은 쇠락을 거치며 80년대의 아류로 취급받는, 단순한 패배주의가 아닌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그래서 4년 2개월 옥살이 마치고 나와서 당연한 부책의식,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한총련 합법화운동을 했어요. 빨리 부화가 돼야 했는데, 세상의 변화를 위해 자기전문성을 갖고 사회생활에 투신하는데 시간이 걸렸어요.

지금도 '강 의장'이라고 불러주시는데 불편하진 않아요. 예전엔 저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두려웠어요. 그 기억의 기대에 부합하고 살아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기억해준 것만으로 민망하고 황송하고 고맙습니다. 사람들이 '오늘의 나'로,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모습의 나로 평가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예전에 '강인했던 강위원'으로부터 현재의 나로 빨리 옮겨 오는 것이 목표이기도 해요. '저 이렇게 바뀌었다'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밥도 되면서 꿈이 되는 자기전문성 필요하다"



'이렇게 바뀌었다'고 말하고 싶다 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의 말처럼 '원래 꿈꿨던 자리로 돌아간 것'인지 모른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 사회복지를 하려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가 처음 감옥에 들어간 건 1989년. 강 대표는 '광주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광고협)'을 만들어 의장으로 활동하며 '전교조 지원 투쟁'을 하다가 구속되고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그때 광주교도소 특사 독방살이를 하던 '기라성 같은 운동권 선배들'을 그는 출소 후 검정고시를 마치고 찾아보았다. 혁명운동하고 있을 줄 알았던 그들은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면서 운동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다. 그에겐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학생운동의 뜻을 오래되고 길게 유지하려면 "밥도 되면서 꿈이 되는 자기전문성 필요하다는 현실적 고민을 많이 하게 됐다"고 한다.

"두 번째 출소 후에 2년 동안 한총련 합법화 운동을 하고 2003년 말 대구에 있는 한 농촌사회복지시설로 갔어요. 거기서 2007년 2월까지 일했어요. 그곳 대표님이 과 학생회장할 때 자매결연 맺었던 지체장애시설의 보모님이셨어요. 심리적으로 광주와는 먼 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죠. 말 그대로 다 끊고 대구로 갔어요.

시설에 근무하면서 사이버로 사회복지사 공부하고 현장인 작은 농가시설에서 자원봉사 하다가 법인 사무국장으로 채용되기도 했어요. 거기서 그렇게 3년 6개월을 일했습니다. 그곳이 규모 있는 시설이었다면 사회복지 관행 같은 것을 배우게 돼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 시설 운영하는 분의 철학이 훌륭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사회복지 초년생시절이었습니다."

대구에서의 경험은 새로운 농촌공동체 모델에 대한 고민을 싹 틔워주었다. 그는 '중심보다는 변방으로, 복판보다는 가장자리로 가야겠다'며 뜻을 같이할 이들을 규합했다. 평생동지인 권혁범·이영훈씨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1년 동안 만나면서 새로운 복지공동체에 대해서 공부했다. 그 공부모임 인터넷 카페 이름이 '여민동락'이었다. <맹자> 양혜왕 편에 나오는 "민초와 함께 즐거움을 같이한다(與民同樂)"는 말이다. 여민동락은 그들이 영광에 뿌리 내린 농촌공동체 이름이 되었다.

'전국구' 인물이 고향으로 돌아온 까닭

영광은 강 대표의 고향이다. 이른바 '귀농귀촌 십계명'의 으뜸 조항은 '고향으로 가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강 대표는 2007년 고향 영광으로 들어갔다. 결단의 중심엔 어머니가 있었다. 두 번 교도소를 다녀오고, 서울이며 대구로 떠돌다가 사는 동안 어머니는 세월 따라 주름마저 깊어갔다. '자식 노릇 한번 해보자'는 작은 사심으로 고향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대학까지 나온 멀쩡한 자식이 다 쓰러져 가는 농촌으로 돌아오는 것을 반기는 어미는 없다. 한총련 의장까지 지낸 '전국구' 인물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는 동네인사는 드물다.

"어머니는 '십년 뒤면 노인들 다 죽어 몇 명 살지도 않을 것인데 큰일 할 줄 알았더니 노인들 똥 기저귀나 빨러 오냐'며 극구 반대하셨어요. 지역 주민들은 대학 나와서 도시에서 시골로 오는 것을 실패로 보고, 영광군 식자층은 6.2지방선거 앞두고 '강위원이가 정치하려 하나' 의심했고요. 심지어 관변단체들은 '한총련 빨갱이 왔다'고 네 시간 동안 항의하고 가기도 했어요.

또 어떤 분들은 '강위원 같은 사람이 정통 운동해야지 한가롭게 학교 살리기하고 노인복지, 농촌살리기나 하냐'고 힐난했어요. 마음 많이 아팠지요. 새로운 길 가다 보면 반드시 돌부리에 치이는 법이니까 입 닫고 오로지 현장에만 집중하자며 견뎌냈어요.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현장이니까요."

그렇게 1년이 지나니 제일 먼저 주민들이 나서서 그를 안아주었다. "밥은 묵고 살아야제"하며 쌀을 내려놓고 가고, "마늘 까서 줘야쓴디 그냥 갖고 와 미안하네"하며 김장에 쓰일 양념재료를 얼른 내려놓고 후다닥 가버리는 마을 어른들이 그를 울렸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요샌 농촌사람 더 징해야'하는 말입니다. 그 말을 거꾸로 하면 주민들을 그렇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주민들을 존엄하게 대하면 반드시 존엄하게 반응합니다. 이해관계로 규정하고 대하니까 반응이 그렇게 나오는 것이지요."

강위원과 여민동락의 '행복지수 높은 농촌공동체' 실험




강위원과 여민동락의 '행복지수 높은 농촌공동체'에 대한 실험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진행되고 있다. ▲학교가 살아야 마을이 산다 ▲자기노동으로 돈벌이 하는 마을 ▲행복지수 높은 공동체에 대한 끝없는 탐구 등이다.

강 대표는 "페교 위기에 놓인 학교를 살리는 것은 농촌공동체 활성화의 핵심 조건"이라고 했다.

"농촌은 은퇴부부들의 노후생활 대상지가 아닙니다. 농촌공동체를 활성화하려면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야 하고, 그럴려면 반드시 학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영광에 들어올 때 자기자식들 도시나 해외로 유학 보내지 않고 시골학교 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지역운동에서 학교는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초등학교 폐교하면 30억 원, 중학교 폐교하면 100억 원 보상금 준다고 합니다. 농촌 최대 문제는 농민 스스로 갖고 있는 패배주의입니다. 정부의 반복된 농촌정책 실패가 패배주의를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없는데 마을에 돈이 들어오면 뭐합니까."

여민동락은 5년 안에 학교를 못 살리면 마을을 떠나 도시로 갈 것이라고 배수진을 치며 노랑 중고차 한 대를 샀다. 멀리서도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통학버스를 마련한 것이다. 학부모들은 '방과 후 학교' 교사로 나섰다. 여러 가지 체험교실이 꾸려졌다. 마을 어르신들은 학교발전위원으로 참여했다. '우리 마을 학교 좋은 학교'라며 여기저기 은근히 입소문을 내고 전학을 권유했다.

2009년 12명이었던 영광 묘량중앙초등학교 학생 수는 2012년 7월 현재 32명으로 늘었다. 3명뿐이었던 유치원생도 지금은 15명으로 늘어났다. 강 대표는 "뭔가 성공의 감동이 있어야 한다"며 "협동하니까 이뤄지는 것이 있구나 하고 어르신들이 신명나 하시는 것이 학교살리기의 가장 큰 성과"라고 말했다.

사실 여민동락이 유명해진 것은 '모싯잎 송편공장'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여기저기 정부가 후원하는 마을기업이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여민동락이 마을주민들과 함께 만든 모싯잎 송편회사인 '여민동락 할매손'은 정부 후원을 받지 않는 최초의 마을기업일 것이다. 이 마을기업의 현재 매출액은 약 3억 원.

강 대표는 영광군 묘량면 8개리에 각각 마을기업을 만들 구상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되면 약 2000명의 주민들이 정부보조금에 손 내밀지 않고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

"한 시골교회 목사님이 제게 전해주신 얘긴데요, 하루는 십일조로 천원 내던 분이 만원을 턱 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할머니 돈 잘못 내셨네요' 하니까 할머니 말씀이 '나도 직장 있는 몸이요' 하시더란 겁니다. 어르신들을 지역공동체의 당당한 주체로 세워주는 것이 천원짜리 밥 나눠주는 프로그램 짜는 것보다 훨씬 시급합니다.

마을주민들이 직접 마을기업 만들고 도시판매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면 어르신들도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 헌금도 당신이 번 돈으로 내고, 손자들 용돈도 줄 수 있는  품위 있는 노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예전엔 학교에서 가을운동회가 열리면 온 마을이 다 가을운동회에 참여했잖아요. 원래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자연력을 복원하는 것이 진짜 복지입니다. 지금의 복지는 노인센터에선 노인 데려가고, 아동센터에선 아동 데려가고, 장애인복지센터에선 장애인을 데리고 가버려 마을에 사람이 없습니다. 마을 스스로 복지를 이룰 수 있는 본래의 힘을 키워주는 역할을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늘 현장에서 꿈꾸고 도전하는 그의 행복지수는 얼마일까





강 대표는 2011년부터 광주 광산구노인복지관장을 겸하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잠시 이곳으로 파견 나와' 있다. 그가 '잠시'라고 표현하는 까닭이 있다. 여민동락이 농촌공동체 모델이라면 광산구노인복지관은 도농복합형 공동체 모델을 실험할 수 있는 곳이다. 그는 언젠가 아파트밀집형 공동체 모델을 만들고픈 꿈을 품고 있다.

"한 국가를 경영할 수는 없다 치더라도 농촌복지공동체, 도농복합형공동체, 아파트밀집형 도시공동체의 롤 모델을 만들고 싶습니다. 가장 맑은 20대 청춘시절에 품었던 변혁적 열망과 의지를 30, 40, 50대에 가뭇없이 휘발시키지 않고 야성적 정열을 가지고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이런 구체적 삶의 현장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면 정치적 언덕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분노로 정의는 세울 수 있어도 자기 삶의 평화를 잘 유지하지 못하면 동지와 이웃 세상에 대해 아파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분노하지만 그 분노 안에 지극한 사랑이 있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포용력이 궁색한 평가는 야박합니다. 타인의 삶을 한 마디로 한 문자로 정리해서 규정하는 것이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삶의 무게중심이 세워졌다고 할까요.

그렇게 제 스스로 삶의 무게중심이 서니까 마음에 참된 여유가 생기고 평화가 생기더라구요. 마음에 생긴 평화가 저를 이웃공동체와 전국적 사안에 더 민감해지고 연대하게 합니다. 분노가 나를 연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가 먼저 나를 세워 제주 강정마을과 쌍용자동차, 희망버스에 더욱 더 예민한 관심을 가지게 합니다."

강위원, 그는 어쩔 수 없는 '운동권'이다. '직업 운동가'를 자처한 이들이 잠시 잊었거나 당위적인 단어로 만들어버린 '현장'에 여전히 살고 있어서다. 운명, 행복한 운명이다. 스스로 만들어 온 삶의 평화와 여유가 준 행복한 운명. 늘 현장에서 꿈꾸고, 늘 현장에서 도전하는 그의 행복지수는 얼마일까.